데릭 지터(Derek Jeter)는 뉴욕 양키즈의 "영원한 캡틴"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친 양키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유격수로서 지타가 활약한 기간 양키즈는 월드시리즈를 5회 재패하였습니다.
성장 과정
지터는 1974년 의사인 흑인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참고로 이 둘은 아버지가 주독미군으로 독일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가 독일 현지인은 아니고 어머니 또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독일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지터는 뉴저지주 피카노 타운십에서 태어났으며, 4살 때 미시간 주로 이사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방학 때마다 조부모 집에서 지내면서 그때부터 뉴욕양키즈 경기를 직접 보면서 양키즈의 열렬한 팬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전천 후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가을에는 크로스컨트리를 뛰고, 겨울에는 농구를, 봄에는 야구팀에서 활약했습니다. 야구 선수로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엄청난 타격 재능을 과시하며 고등학교 4년 중 2학년 때 타율. 557, 3학년 타율. 508 그리고 졸업반일 때에는 타율. 508, 23타점, 4 홈런, 출루율. 637, 장타율. 831, 12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삼진은 딱 1개 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각종 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고등학교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지터의 모교는 2011년 그의 명예를 기리며 학교의 야구 필드 이름을 개명했습니다. 이런 지터가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한 1992년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스카우터 헬 뉴하우저는 구단에 지터를 지명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으나, 지터가 대학 포기에 대한 대가로 높은 사이닝 보너스를 요구할 것을 우려하여 지터를 건너뛰게 됩니다. 이에 6순위 지명권을 가진 뉴욕 양키즈에서 1라운드에서 그가 대학으로 진학할 우려를 감수하면서도 지터를 지명하였고, 결국 80만 달러에 계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 : 뉴욕 양키즈 황금기의 주역
데릭 지터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마이너리그에서 4년째 뛰고 있던 1995년 시즌에 이루어집니다. 시즌 초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주어지며 그 해 5월 29일 데뷔하지만 그의 첫 시즌은 15경기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15경기에서 안타 12개를 쳐내며 타율. 250 OPS 0.669를 기록하며 갓 데뷔한 선수로선 무난한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불안한 수비로 에러를 2개 기록하는 등 아직은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팀이 판단하면서 이후 시즌은 페르난데스가 유격수를 맡게 되고 지터는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됩니다. 하지만 다시 기회가 찾아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데릭 지터가 강등되고 그 시즌 페르난데스가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하고 부상으로 108 경기만을 소화하자 새로 감독에 선임된 조 토리는 1996년 지터를 주전 유격수로 낙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양키즈의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이 결정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매리너스의 유격수 펠릭스 페르민을 영입하기 위하여 훗날 양키즈 황금기의 또 하나의 주역인 마무리 투수 마리에노 리베라를 보내는 트레이드를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카우팅 부회장 마이클과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의 설득으로 해당 트레이드는 추진되지 않았고 지터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결국 그는 1962년 이후 양키즈에서 주전 유격수로 시즌을 시작한 첫 선수가 되었고 정규 시즌에서 타율. 314, 10 홈런 78타점을 기록하며 역대 5번째로 만장일치의 "올해의 루키로" 선정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루키 시즌에서 플레이오프 타율. 361, OPS. 868 등의 완벽한 활약으로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는 1980년대 뉴욕 양키즈의 암흑기를 끝내는 우승이었으며 또한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로 이어지는 양키즈의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우승이었습니다. 지터의 루키 시즌은 또한 기존의 캘 리프켄 주니어, 배리 라킨, 오지 스미스로 대표되는 유격수 세대를 종결하고, 알렉스 로드리게스,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함께 새로운 메이저리그 3대 유격수의 시대의 서막이 올라간 시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화려한 루키 시즌을 시작으로 그는 메이저리그 20년 동안 3,465안타, 260 홈런, 1,311타점, 그리고 통산 타율. 310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한 루키 시즌 외에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 시즌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으며, 2009년에도 한차례 더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며 총 5개의 우승 반지를 획득하게 됩니다. 2000년에는 올스타 게임 MVP와 월드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하기도 하였고, 커리어 통산 올스타 게임 14회, 실버슬러거 5회, 골드글러브 5회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전국구 스타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팀의 유격수에서의 화려한 정규시즌 기록도 있지만 한 경기가 중요한 포스트 시즌에서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점입니다. 월드시리즈 5회 우승의 화려한 경력 중에서 그는 포스트 시즌 통산 타율. 308, 출루율. 374, 장타율. 465, 홈런 20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통산 정규 시즌 기록과 큰 차이는 없으나 약팀이 없고, 에이스 급 투수들만 출전하는 포스트 시즌에서의 성적이면서 거의 메이저리그 한 시즌에 해당하는 158경기의 누적 성적으로 바라봤을 때 정말 대단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2014년 145경기를 소화하면서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하였으며, 2020년 명예의 전당 자격을 갖춘 첫해서 만장일치에서 한표 모자란 99.7%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됩니다.
그 외 이야기
데릭 지터의 화려한 포스트 시즌 활약에 걸맞게 그는 "Mr.November"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합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시리즈가 11월까지 치러지게 되는데 이는 그해 9.11의 비극 때문에 모든 일정이 연기되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이 시즌 월드시리즈 4차전은 10월 31일 경기였지만 경기가 자정을 넘기 진행되었고 자정이 넘어서 지터의 끝내기 홈런으로 양키즈는 승리하게 됩니다. 이 경기를 계기로 기존의 레지 잭슨이 가지고 있던 "Mr.Octorber"에 빗대어 데릭 지터에게는 "Mr.November"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붙게 됩니다. 항상 중요한 경기에서 결정적인 활약으로 다섯 차례 양키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그는 은퇴하던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또한 그의 명성에 걸맞은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 냅니다. 2014년 9월 25일 볼티모어와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그는 2번 타자로 나와 첫 타석에서 2루타, 네 번째 타석에서는 빗맞은 땅볼로 2타점을 기록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2점 앞서고 있던 9회 초 팀의 마무리 투수 로벗슨은 그에게 화려한 홈경기 은퇴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2개의 홈런을 맞으며 블론세이블 기록하고 경기는 9회 말로 넘어갔고, 1 아웃 2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지터는 끝내기 안타를 치며 그의 마지막 홈경기를 드라마틱하게 마무리합니다. 데릭 지터는 구단 경영에 관심이 많았고 은퇴 후 2003년 양키즈를 꺾고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던 플로리다 말린스의 구단주가 됩니다. 말린스 인수 후에는 구단의 주요 인사들에게 모욕적인 오퍼를 하면서 내치고, 또한 팀의 대표적인 스타 선수였던 스탠튼을 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고압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선수시절 받았던 화려한 평가와는 반대되는 평가를 받는 구단주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지터는 스탠튼을 본인이 평생 활약한 뉴욕 양키즈로 트레이드하였고, 스탠트는 2018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처참한 활약을 하면서 보스턴이 승리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고 그해 보스톤이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치하며 지터는 평생 처음으로 뉴욕팬들에게 욕먹는 한 해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