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피아자는 메이저리그 포수 중 공격적인 측면에서 가장 우수한 선수였습니다. 통산 15년의 메이저리그 활약 속에서 수비가 가장 우선시되는 포수라는 포지션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수비는 최악에 가까운 포수이면서 동시에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공격형 포수로 활약하며 201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됩니다. 또한 그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그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입단하고 활약했던 시절 다저스에서 이미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장 과정 및 메이저리그 지명 : 드래프트 62라운드 1390번째 지명
피아자는 굳이 야구를 안해도 될 만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빈스 피아자는 1억 달러대의 엄청난 부를 쌓을 만큼 성공한 사업가였고, 야구 광팬이던 그는 아들들을 야구 선수로 성공시키기 위해 개인 연습장까지 따로 지어서 아들들을 훈련시켰습니다. 하지만 다섯 형제들은 야구에 소질이 없었고 그나마 피아자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여 그를 선수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하물며 메이저리그의 전설인 테드 윌리암스까지 초빙하여 레슨을 받도록 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이크 피아자는 그리 운동 신경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얼마나 자기의 아들을 메이저리그 선수로 만들고 싶었으면 학창 시절 그의 실력으로는 드래프트에서 지명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직접 구단을 인수할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포기하고 마이크 피아자는 아버지의 절친이자 본인의 대부였던 다저스의 감독 토미 라소다의 추천 통해 1988년 62라운드 1,390번째로 다저스의 지명을 받게 됩니다. 물론 메이저리그 지명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1라운드이건 62라운드이건 아마추어 선수 중 상위 1프로 미만의 선수만 이룰 수 있는 어려운 성과이며 어느 정도 재능을 가진 선수라는 상징이긴 하지만 3,4라운드 지명자도 메이저리그 데뷔 가능성이 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이크 피아자의 메이저리그 활약은 전대미문의 다시 보기 힘든 역사적 사건입니다. 참고로 최근 메이저리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20라운드까지만 선수 선발을 진행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마이크 피아자 정도의 학창 시절 재능은 메이저리그 문턱에 근접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와일드카드처럼 선택된 그였지만 이는 그만큼 그 부족한 재능을 끊임없는 노력으로 극복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메이저리그 주요 경력
마이크 피아자는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 .308, 홈런 427개, 타점 1,335개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포수 포지션에서 기록한 427 홈런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기록이며 통산 3할 타율과 400 홈런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포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9년 연속 3할 타율과 10년 연속 30 홈런을 기록하며 실버 슬러거를 10회 수상했습니다. 1988년 드래프트 된 그는 1992년 시즌 후반기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었으며, 1993년 24세의 나이로 다저스의 주전 포수로 도약하게 됩니다. 주전이 된 첫 시즌 타율. 318, 35 홈런 112타점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실버슬러거를 동시에 수상하면서 단숨에 최고의 공격형 포수에 등극하게 됩니다. 그는 1998년 다저스와의 계약에 대한 갈등 끝에 트레이드 되게 되는데 그의 다저스 시절 마지막 풀타임 시즌인 1997년 시즌 14승을 올리며 본격적인 성공스토리를 쓰기 시작한 박찬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으로 호흡을 맞췄습니다. 그 이후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다시 한 팀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두 선수 모두 선수 시절 마지막을 향해 가던 전성기를 한참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997년 시즌 피아자는. 362의 고타율과 200안타를 돌파했고, 40 홈런 124타점의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커리어 내내 그의 공격력과 정반대의 수비 능력으로도 주목을 받았던 선수였습니다. 특히 박찬호와 함께한 시즌 가장 많은 16개의 실책을 기록하고 도루 저지율 또한 3할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내 팬들에겐 그의 수많은 공격에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수비 못하는 포수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1998년 다저스는 84M 규모가 계약을 거절한 피아자와 3루수 토드 질을 플로리다 말린스에 넘기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였고, 애당초 피아자의 연봉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던 말린스는 며칠뒤 그를 뉴욕 메츠로 넘기면서 그의 메츠에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츠로 이적 후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내셔널리그 우승과 양키즈와의 서브웨이 월드시리즈를 성사시키는 활약을 선보이며 첫 4 시즌 기간 동안 타율. 302, 출루율. 576등 그의 명성에 걸맞은 우수한 공격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고 특히 그의 포수 수비 능력에 대한 비판이 지속되며 1루수로의 포지션 전환 시도도 하는 등 서서히 전성기의 모습을 잃어갔지만 7 시즌 반동안 타율. 296, 220 홈런, 655타점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타격에서 답답했던 메츠의 4번 타자로서 역사에 남을 활약을 펼쳤습니다. 2005년 메츠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소화한 후,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을 통해 커리어 마지막 포수 풀타임을 소화했으며, 2007년 오클랜드에서 지명타자로 뛴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메츠 시절 중 2001년 9월 21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친 그의 홈런은 아주 특별한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경기는 그 해 9월 11일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뉴욕에서 해당 사건 이후 열린 첫 번째 홈경기였으며 당시 8회까지 팀이 1점 뒤진 상황에서 피아자의 2점짜리 홈런으로 메츠는 극적인 역전승을 하게 되며 충격과 슬픔에 빠졌있던 뉴욕 전체에 큰 용기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외 이야기 : 로저 클레멘스와의 악연
마이크 피아자와 로저 클레멘스는 메이저리그에서 대표적인 앙숙으로 유명합니다. 피아자의 뉴욕 메츠 시절 같은 연고를 가진 뉴욕 양키즈에서 활약 중이던 로저 클레멘스느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피아자는 유독 클레멘스에게 강한 면모를 보여줬는데 2000년 6월 9일에 그를 상대로 만루 홈런을 칩니다. 그로부터 1달 뒤에 열린 양 팀 간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이들의 악연의 서막이 시작됩니다. 클레멘스는 2회 타석에 들어선 피아자의 머리 쪽으로 빈볼을 던졌고, 공에 맞은 피아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둘은 언론을 통해서 수시로 상대를 비난하며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즌 두 팀은 그 유명한 서브웨이 월드시리즈를 치르게 되었고 결국 양키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 1회부터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피아자 1회 파울볼을 칠 때 부러진 방망이 조각이 클레멘스를 향했고, 클레멘스는 이 방망이 조각을 잡아들어서 1루로 달리던 피아자를 향해 던져버립니다. 이로 인해 양 팀은 순식간에 벤치클리어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이 둘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2004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한 클레멘스가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 피아자가 선발 포수로 선정되면서 이번엔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추게 되는데 야구의 축제인 올스타전에서 그것도 같은 팀의 선발 투, 포수로 호흡을 맞추는 순간에서조차 사건은 터집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서로에게 감정은 없고 다 지난 일이라고 하였으나, 1회부터 둘은 볼배합을 가지고 부딪혔고 결국 클레멘스는 1이닝 동안 홈런 2개 포함 5개의 안타를 내주며 6 실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끈질기게 이어져온 악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