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는 매해 각리그 최고의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사이 영" 상을 수여합니다. 이는 1890년부터 1911년까지 22년간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통산 511승을 올린 사이 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6년 제정되었습니다.
사이 영 소개
1867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덴턴 트루 영 (Denton True Young)이나, 사이 영 (Cy Young)이란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이 별명 Cy는 'Cyclone'에서 유래했는데, 그의 강력한 투구가 마치 사이클론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1890년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계약하며 메이저리그 무대에 데뷔합니다. 농장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와주면서 몇몇 세미 프로팀의 내야수로 뛰었는데 칸톤이란 팀에서 15승 15패를 기록한 후 $300의 이적료로 스파이더스로 가게 됩니다. 22년간 그는 5개의 메이저리그 팀에서 활약하면서 수많은 기록을 수립했는데, 몇몇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현대 야구의 특성상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입니다. 통산 511승이 대표적인 기록으로 이는 2위 월터 존슨과는 94승 더 많은 기록입니다. 또한 5 시즌에서 30승 이상을 기록했고, 10 시즌에서 20승 이상을 올렸습니다. 근대 야구에서 첫 번째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으며 세 번의 노히트노런, 완봉승 76회를 기록했는데 완봉 1위는 월터 존슨의 110회입니다. 승수 외에도 깨지지 않는 통산 기록으로는 최다 이닝 (7,355이닝), 최다 선발 출전 (815경기), 최다 완투 (749경기)가 있으며 316패를 기록하며 패전에 있어서도 통산 1위 기록 보유자인데, 이는 퍼드 갤빈과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유이한 300패 이상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 중 정말 놀라운 기록 하나가 눈에 띄는데, 749경기에서 완투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총 선발 출전이 815경기인데 이중 92%의 경기에서 완투를 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물론 당시의 야구와 현대 야구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이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이는 정말로 어마어마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클리블랜드에서 9년, 세인트루이스에서 2년을 활약한 후 1901년에 출범한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한 그는 보슨토에서의 첫 시즌에서 33승, 자책점 1.62, 158 삼진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냅니다. 또한 1903년 레드삭스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하고, 1904년에는 또 하나 깨지지 않고 있는 25와 1/3이닝 연속 무안타이닝과 함께 아메리칸 리그 첫 퍼펙트게임을 기록합니다. 그는 보스턴에서 1908년 41세의 나이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은퇴합니다.
후대의 평가
1990년대에 사이 영의 활약을 월터 존슨과 비교하며 그의 기록들을 무식하게 오랫동안 많이 던져서 달성한 업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가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들어 세이버 매트릭스가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이런 평가들은 사라지게 되며 그가 월터 존슨과 함께 역대 1,2위를 다투는 위대한 투수임을 부정하는 시선은 사라졌습니다. 당시의 투수들의 성적만 비교해도 이는 명확합니다. 그는 22년간 17번 리그 다승 10위안에 들었으며, 16번 평균자책점 10위안에 들은 것을 포함 투수들의 주요 기록에서 리그 10위안에 든 횟수가 월터 존슨보다 많았습니다. 사이 영은 22 시즌, 월터 존슨은 21 시즌을 뛰었는데 주요 기록에 있어서 리그 10위권에 얼마나 자주 랭크되었는지에 대한 점수에서 사이 영이 1위이고 월터 존슨이 2위를 기록합니다. 비율 스탯 또한 우수하여 7,355이닝이나 던지면서도 조정 평균 자책점이 138로 역대 19위이며, WHIP은 1.13입니다. 비율 스탯은 오래 던질수록 악화되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그렇게 많이 던지면서 기록한 이러한 기록들은 그의 기록이 단순히 많이 던져서 달성된 것들이라는 평가가 말이 안 됨을 보여줍니다. 특히 bWAR 투수 통산 1위, fWAR 투수 통산 2위에서 볼 수 있듯이 선수를 가장 효율적으로 평가하는 세이버 매트릭스의 스탯이 그가 얼마나 위대한 투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진화시키며 장기간 활약하며 불멸의 기록들을 달성했습니다. 보스턴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11년간 286승을 기록한 그의 나이는 34세로 이는 선수로서 하락세에 접어들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적 전 시즌 커리어 로우 시즌을 기록하며 20승 달성에 처음 실패하고 이닝 또한 최저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보스턴으로 이적 후 그는 새로운 변화구를 연마하고, 제구력에 신경 쓰며 하물며 투구마다 팔각도를 바꿔가며 던지며 떨어진 직구 위력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적 원년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그를 말년에 평균 이상의 활약정도만 한두해 해주기를 기대하며 영입한 보스턴에서 11 시즌을 더 던지며 225승을 추가했습니다. 그는 40대를 넘어서까지 리그를 지배하는 활약을 펼친 거의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한 투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
사이 영하면 그의 독보적인 신체 조건으로 유명합니다. 188cm의 키에 95kg은 당시의 신체 조건으로는 압도적이였던게 당시의 유명했던 투수들보다 키는 10cm 이상 크고, 체중인 20kg 더 많이 나갔습니다. 한 세대 뒤의 거인 투수로 유명했던 월터 존슨보다도 키 2cm, 몸무게 5kg이 더 나갔으며, 이는 지금 시대의 기준으로 봤을 때 키 2미터, 몸무게 120kg의 정도의 투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으며, 앞서 언급한 그의 별명 "사이"는 그의 프로 시즌 첫 해 그의 공을 받던 포수가 붙여 준 것입니다. 구속 측정을 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에 그의 공이 얼마나 빨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데뷔 당시 포수 짐머가 글러브 속에 소고기스테이크 조각을 집어넣고 그의 공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공이 위력적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이영의 데뷔 2년 후에 메이저리그 투구 거리를 15미터에서 18.44미터로 늘렸는데 이는 사이 영, 아모스 루시, 주엣 미킨등의 공이 너무 빨라서 이런 조치가 취해진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5년 사이 영은 월드시리즈에서 3승을 기록하며 팀의 4승 1패 우승을 이끌었는데 이때 그는 팔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느린 공을 섞어서 던지기 시작했는데 이게 오늘날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대표적 주 무기로 자리 잡힌 "체인지업"의 시초입니다. 그는 1908년 41살의 나이로 은퇴하는데 사실 은퇴한 시즌에도 그는 21승에 평균자책점 1.26을 기록합니다.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피칭에 있어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몸무게와 둔해진 순발력으로 인해 공을 던진 이후 수비가 안되며 특히 투수 앞 번트에 대한 수비가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은퇴하면서 스스로 번트 때문에 은퇴한다며 웃었습니다. 은퇴 후 그는 잠시 감독직을 맡기도 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농장에서 보내며 지냈고, 1955년 그가 숨을 거두자 바로 다음 해 그를 기려 "사이 영" 상이 탄생하게 됩니다.